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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이야기] 한국 야구를 만든 네 선수 (이승엽, 선동열, 최동원, 이종범)

by 퍼니한수달 2025. 7. 26.

한국 야구를 만든 네 선수 관련 이미지

 

한국 야구의 역사에는 수많은 스타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전설’로 불리는 선수들은 손에 꼽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단순한 성적을 넘어서, 야구를 문화로 만들고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네 명의 선수가 있다. 마운드에서 시대를 지배했던 최동원선동열, 타격과 파워의 상징 이승엽, 그리고 야구 그 자체라 불린 이종범. 이 네 명은 각자의 시대와 포지션에서 한국 야구의 기준이 되었으며, 여전히 회자되는 살아 있는 혹은 영원한 레전드다.

최동원 – 투혼과 불멸의 야구 투수 에이스

1980년대 초반, 한국 프로야구가 막 태동하던 시기. 그 중심에서 ‘혼자서도 팀을 이긴다’는 말이 가능했던 유일한 투수가 있었다. 바로 최동원이다. 그는 롯데 자이언츠의 상징이었으며, 동시에 마운드 위의 전설이었다. 특히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4승 1세이브라는 믿기 어려운 기록으로 롯데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 해 5차례 등판해 무려 4승을 올린 그 장면은 지금도 KBO 최고의 퍼포먼스로 회자된다.

최동원의 통산 기록은 103승 74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46. 이 수치는 단순한 숫자 이상이다. 특히 당대에는 투수가 불펜 없이 9이닝을 책임지는 시대였으며, 그의 많은 이닝 소화는 말 그대로 ‘투혼’ 그 자체였다. 매 경기마다 전력을 다했고, 팀의 승리를 위해 자신의 어깨를 아끼지 않았다. 그 유명한 "내 어깨는 아직 괜찮다"라는 말은 그의 정신을 가장 잘 대변하는 명언이 되었다.

은퇴 이후에는 선수협 창설 등 야구계의 구조적 개혁에도 앞장섰으며, 한국 야구가 보다 투명하고 공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2011년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등번호 11번은 롯데 구단 최초의 영구결번이 되었고, 현재까지도 부산과 전국 야구 팬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최동원은 단순한 투수가 아닌, 시대정신을 상징한 야구의 투사였다.

선동열 – 야구 투수로써 완벽이라는 단어의 정의

최동원의 뒤를 이어 1980~90년대를 지배한 투수가 있다면, 그는 단연 선동열이다. 선동열은 마운드 위에서 가장 완벽에 가까운 투수였다. KBO 통산 평균자책점 1.20이라는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으며,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투수로 평가받는다. 삼진, 세이브, 승리 등 어떤 부문에서도 빠지지 않는 기록을 남기며, 해태 타이거즈를 수차례 우승으로 이끌었다.

선동열은 빠른 직구와 슬라이더를 중심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실투 없는 완벽한 투구를 구사했다. 그의 제구력은 "원하는 곳에, 원하는 높이로 던진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였고, 특히 9회에 등판하는 순간 팬과 상대 모두 ‘이제 끝났다’고 체념할 정도의 위력을 자랑했다. 해태에서 마무리와 선발을 모두 경험하며, 두 포지션에서 모두 리그 최고를 찍은 유일한 선수기도 하다.

1996년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로 진출해 NPB에서도 실력을 증명했고, 귀국 후에는 지도자로도 활약하며 야구 발전에 이바지했다. 그는 투수의 기술뿐 아니라, 선수로서의 태도, 팀워크, 프로 정신 등에서도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존재였다. 선동열은 한국 야구가 국제 경쟁력을 갖추는 데 있어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그는 한국 야구가 ‘수준’을 갖췄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린 존재였다.

이승엽 – 국민타자, 아시아 야구 홈런왕의 위엄

이승엽은 한국 야구가 ‘기술’을 넘어 ‘흥행’과 ‘문화’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1995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데뷔해 23세의 나이에 54홈런을 기록하며, ‘홈런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이후 2003년까지 KBO에서 324홈런을 기록하고 일본 프로야구(NPB)에 진출했다. 일본 무대에서도 총 159홈런을 기록하며 한·일 통산 467홈런이라는 전무후무한 아시아 기록을 세웠다.

이승엽은 단순한 파워히터가 아니었다. 선구안과 변화구 대처 능력, 경기 상황을 읽는 집중력은 그를 ‘완성형 타자’로 만들었다. 특히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일본전과 쿠바전에서의 결정적인 홈런은 한국 야구 역사에 남을 명장면이었다. 국민 모두가 그의 스윙 하나에 환호했고, 이승엽은 ‘국민타자’라는 별명에 걸맞게 국가대표로서 수많은 국제 대회에서 결정적인 순간을 책임졌다.

은퇴 후에도 감독, 해설위원, 유소년 야구 육성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한국 야구의 미래를 위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단순히 홈런 타자를 넘어, 야구를 통해 사람들에게 꿈과 감동을 준 스포츠 스타로 남아 있다. 이승엽은 한국 야구의 ‘이름값’을 국제 무대에서 증명한 대표적인 아이콘이었다.

이종범 – 야구의 예술을 보여준 5툴 플레이어

“야구는 이종범이다.” 이 문장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종범은 한국 야구가 단순한 운동을 넘어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선수다. 그는 타격, 주루, 수비, 송구, 센스 모든 면에서 최고 수준을 보인 최초의 진정한 5툴 플레이어였다. 그의 존재 자체가 ‘스타일’이었으며, 팬들은 그가 뛰는 모습을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았다.

특히 1994년 기록한 한 시즌 84도루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다. 도루는 단순히 빠르기만 해선 불가능하다. 그는 투수의 견제를 읽는 능력, 슬라이딩 기술, 순간 가속력, 그리고 타이밍 감각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또한 중장거리 타자로서의 파워도 있었으며, 수비에서는 센터라인과 3루를 자유롭게 오가며 압도적인 활동 반경과 어깨를 자랑했다.

이종범은 해태 타이거즈에서 수많은 우승을 함께하며 ‘우승 청부사’로 불렸고,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에서도 활약했다. 그의 플레이는 보는 사람에게 야구의 즐거움과 스릴을 동시에 안겨주었고, 오늘날 야구 팬들에게도 가장 ‘보고 싶은’ 선수로 꼽힌다. 현재는 아들 이정후가 그의 야구 DNA를 이어받아 한국을 대표하는 타자로 성장하고 있다. 이종범은 야구의 모든 기술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해낸 선수였다.

결론 – 한국 야구, 이 네 사람이 만들었다

최동원, 선동열, 이승엽, 이종범. 이 네 명의 이름은 단순한 기록 그 이상이다. 이들은 한국 야구를 단순한 스포츠가 아닌, 문화와 자부심으로 만든 인물들이다. 각자의 시대와 포지션에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줬고, 후배 선수들에게는 ‘기준’이 되었으며, 팬들에게는 ‘영웅’으로 남았다.

한국 야구가 지금의 수준과 인기를 얻게 된 것은 이 네 명의 존재 없이 설명할 수 없다. 이들은 단순히 경기를 잘한 선수가 아니라, 야구의 가치를 대중에게 전달하고, 야구를 사랑하게 만든 사람들이다. 기록은 시간이 지나면 깨지지만, 이들이 남긴 감동과 상징성은 어떤 기록보다 오래 남을 것이다.

앞으로도 누군가가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갈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새로운 스타를 마주할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할 것이다. “마운드에서 저 선수는 최동원 같고, 선동열 같다. 홈런을 칠 땐 이승엽이 생각나고, 플레이는 이종범처럼 예술이야.” 이보다 더한 찬사가 또 있을까?